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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주역인 안태국 선생을 ‘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맘스타임즈, 최영진기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태국 선생(1877∼1920)을‘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안태국 선생은 신민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만주(북간도 혼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ㆍ1만세운동 이후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1920년 4월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하였다.

1877년 평안남도 중화(현재 평양 부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노백린, 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최고위 간부인 평안남도 총감에 임명되어 1911년 해체 시까지 4년여간 국권 회복에 힘썼다.

당시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평양지사장을 겸임하던 선생은 1909년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 태극서관을 설립하였고, 신민회의 외곽조직인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초대 총무에 선임되었다.

일제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이후 신민회 간부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신민회에서는 지역 총감이 참석하는 전국 간부 회의를 통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해외에 건설하기로 하고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사업을 실행하였다.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일명 안악사건)’조사 과정에서 신민회가 간도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단서를 잡은 일제는 이를 저지하려고 신민회 간부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때 선생도 보안법 위반으로 붙잡여 1911년 7월에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일명 105인 사건)’으로 조작하여 전국에 걸쳐 신민회 간부 600여 명을 검거하여 기소하였는데, 선생도 복역 중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재 기소되어 1912년 9월에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공판 중에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며 음모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3년 7월 항소심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리고 투옥된 지 5년 만에 석방된 선생은 가혹한 고문과 감옥 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북간도 혼춘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혼춘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후배들과 한민회를 창립하였고,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한민회군을 창설하였다. 이후 한민회군은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생은 안창호의 초청으로 1920년 3월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으나, 임시정부의 요직은 고사하고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에 매진할 뜻을 밝혔다. 안창호가 이를 받아들여 선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애석하게도 1920년 4월 46세를 일기로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선생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상하이 인근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문화대혁명기에 만국공묘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위국헌신한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는 1993년 8월, 광복 48년 만에 박은식ㆍ노백린ㆍ신규식ㆍ김인전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서울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각계인사, 외교사절, 시민 등 6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제전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애국지사묘역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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